미운 오리 새끼라는 동화가 있다. 안델센이라고 하는 덴마크의 작가가 지은 동화이다. 내용은 다음과 같다. 오리가 품고 있던 알 중에 어쩌다가 백조의 알이 섞여있었다. 분명히 오리 어미가 품었는데 부화를 하고 나서 보니 전혀 다른 모양의 새끼가 그 속에 섞여 나온 것이다 하는 짓이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, 백조 자신은 자신이 오리인줄 착각하고 있었다. 그래서 오리의 흉내를 내 보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서 늘 오리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가 어느 날 하늘을 날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그런 내용이다.
오리는 역시 오리이고 백조는 백조일 뿐이다.
요즘 몇 사람의 설교 테잎을 들었다. 이른바 사람들에게 설교를 잘한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의 설교였다. 그 테잎을 들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설교가 부드럽다는 것이었다. 목소리도 비슷하고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설교의 패턴 역시 같다는 생각을 가졌다. 참 설교를 잘하는구나하고 들으면서도 왠지 마음에 찜찜하게 와 닿는 느낌이 있었다. 그 이유는 요즘 한국에서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한다는 이모 목사님의 설교와 비슷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. 즉 이들의 설교에서 느끼는 것은 설교에서 느껴지는 삶의 모습이 없었다는 점이었다. 설교는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있는데 한결같이 내가 들은 설교에서는 그런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.
나는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목사도 못되고 설교를 잘 한다고 평가받지도 못하는 입장이라 다른 사람의 설교를 논한다는 것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을 들을 수 있다. 그러나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가 비슷하다고 느낄 수는 있는 것 아닌가?
요즘 나는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을 설교하고 있다. 나 역시 설교를 하기 위하여 여러 책들을 참고 있다. 내가 주로 보는 설교는 로이드 죤스 목사님의 설교를 많이 참고한다. 알다시피 로이드 죤스 목사님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다. 나는 이 분의 설교를 좋아하고, 그래서 이 분의 설교는 나의 설교의 구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. 그러나 이 분의 설교를 베끼지는 않는다. 그 분의 설교의 영향을 받고는 있지만 내가 먼저 성경 본문을 묵상하고 설교를 작성한 후에 한번 맞추어 보는 정도이다. 이 분의 설교는 워낙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베끼는 것 자체가 성경을 바로 보는 것만큼이나 어렵기도 하지만.........
흉내는 낼 수 있다. 그러나 그 사람의 설교만 흉내내고 그 사람의 삶을 보지 못하면 참다운 흉내는 아니다. 나는 스승으로서 로이드 죤스 목사님을 바라 볼려고 애를 쓴다.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 분의 설교가 우선이 될 수는 없다는 분명한 원칙을 갖고 있다.
설교는 말씀을 바로 주석(註釋)하는 것과 함께 삶이 뒤따라야만 한다.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설교를 흉내내지 못하는지 모른다. 내 삶은 나만이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. 그래서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기도 하지만 말이다. 이 칼럼과 함께 배포되는 나의 설교의 요약이 다른 사람을 그대로 베낀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. 남의 설교를 베끼다가 자신의 삶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연설로 끝나면 그 설교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.



