'그리스도의수난'이라는 영화가 꽤 사람들에게 감명 깊었던 거 같다. 이  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표를 예매해서 본 사람들도 많은데,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. 영화를 보지도 않고 영화를 본 사람들에 대한 말을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, 나는 그 유명한 영화인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. 아니 일부러 그 영화를 안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. 그 영화를 보기  싫은 이유가 그 영화를 보고 미국의 휴매니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호들갑 때문이다. 마찬가지 이유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. 괜히 내가 일부러 꼬장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....

이 영화를 본 후에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감동을 받은 표정들이다. 기분이 좋은 이유는 영화를 보고 은혜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좀더 깊은 생각을  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.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지  않은 나로서는 심술을 부려야 할  이유가 되지 않는다. 이런 영화들이 좀더 자주 나와서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갖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.

물론 이 영화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 우리에게  멧세지를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.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미국의 휴매니즘에  대하여 멧세지를 주고 있는 것이  사실인 것처럼.....

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런 점이다. 그리스도  고난이 단순히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. 왜냐하면 신앙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바램일 뿐 성경은 공동체의 구원을 더 많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.

그리스도의 수난이 그 당시의 고달픈 민중들의 삶을 대변하다가 당시의  기득권층에 의하여 자행된 것을 모르면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면서도 여전히  우리의 기득권을 유지해 달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의 형태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.

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을 대변한  것이다. 우리가-민중이라고 표현 될 수밖에 없는- 당하고 있는 아픔이다. 우리가 그 분의  수난을 철저히 나라는 개인의 축복과 연결시키는 한 실상 그 영화를 보면서도 또 다른 생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가 없다.

그 분의 수난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보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의 수난은 여전히 외로운 수난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.
(Mar. 14. 2004)